단편선과 선원들의 곡, “거인"에 관해
"거인"을 처음 연주한 날이 기억난다. 2015년 8월, 강남의 한 바에서였다. 그 곳은 너무 시끄러워, 우리는 우리의 연주를 전혀 듣지 못하는 채로 공연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거인"은 처음 연주하는 것이었다. 어쨌건 감정선을 잘 끌고 가야하는데 전혀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연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마 크게 망쳤을 것이다. 이 날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우리의 첫 앨범을 함께 만든 바이올리니스트 권지영 씨가 마지막으로 우리와 연주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 연주를 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라곤 전혀 생각하질 못했다. 삶이란 때론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거인"을 처음 쓴 날도 기억난다. 2015년 6월이었다. 해리빅버튼의 성수 형이 ‘록과 힙합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제비다방에서 처음 랩퍼들과 인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우리의 메이트는 최삼 씨였다. 우리는 괜히 의기양양해졌다. 다음 날 '그러면 최삼 씨랑 작업할 곡을 한 번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에 기타로 이것저것 연주해보다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만들어졌다. 동양적인 느낌도, 약간 레게스러운 느낌도 있는 리프였다. 마침 나는 그때 소위 'cocktail'이란 장르로 분류될 법한 경음악들을 많이 찾아 듣고 있었는데, 괜히 "아비정전"에서의 장국영이 추던 맘보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빠르기의 템포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곡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만들기 시작했지만, 결국 완성된 것은 맘보나 레게와는 별 상관없는 곡이었다. 그리고 최삼 씨와 이 곡으로 작업을 하게 되는 일도 없었다. 대신 최삼 씨와는 1년 뒤에 "날"이라는 노래를 함께 연주했다. 그것도 최삼 씨와 미팅을 하기로 약속하곤 같이 할 곡을 다 준비해놓은 다음에 미팅하다가 그냥 즉흥적으로 나온 아이디어가 더 마음에 들어 그냥 그걸로 간 것이다. 사람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듯, 음악도 어떻게 풀릴지 늘 알 수 없다.
수현 씨가 새로운 바이올리니스트로 들어온 이후, 우리는 정신없이 바빴다. 첫째로, 당장에 잡힌 중요한 공연들─잔다리 페스타와 서울아트마켓 등─을 위해 일단 "노란방"이나 "뿔” 같은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 곡들을 먼저 연습해 30~40분 정도의 셋리스트를 만들어야했다. 둘째로, 12월 말부터 앨범작업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아직 곡이 모두 나온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곡들도 만들고 연습해야했다. ([뿔]에 실린 음악 중 반절 가량은 수현 씨가 가입한 이후에 쓰인 것들이다.) “거인"은 늘 뒷전에 있었다. 어차피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먼저 연습을 시작해도 되었겠지만, 그래도 계속 순번이 뒤로 밀려났다. 실은 내가 "거인"이란 곡에 자신이 없던 까닭에서였다.
처음 연주되었던 "거인"은 지금의 것과 많이 달랐다. 삼바 리듬이 복잡하게 얽힌 파트가 있었고, 1절이 끝난 다음에는 난데없이 헤비메탈을 연상시키게 하는 리프가 등장했다. 플릿 폭시즈Fleet Foxes스러운 가스펠 파트도 첨가되어있었다. 그 전에 합주할 때는 누!Neu!나 토터즈Tortoise 풍의 건조한 비트도 실험해보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굉장히 난삽한 팝 음악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나는 난삽하건 말건 듣기에 좋으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 종종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때의 형태는 '좋다'고 자신있게 말하기엔 애매한 것이었다.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 2015년 12월의 단독공연 때가 되어서야 부랴부랴 "거인"을 무대에 올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쎄─ 했다 말할 수도 있겠다.) 연주를 끝냈는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나 역시 무슨 감정으로 노래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숙련도나 자신의 곡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라기 보다는, 어떤 감정을 메인으로 잡고 곡을 이끌어 가야하는지 나 자신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결정타는, 이후 싱글 "연애"의 비디오를 감독하기도 한 ML이 날렸다. "그건 진짜 아니더라.”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곡을 다시 연주해보았다. 확실히 난삽했고, 내러티브가 일관성이 없었다. 그 다음 합주가 있기 전에, 나는 며칠을 고민해 구성을 다시 짰다. 난삽한 파트를 들어내고 대신 일관성 있는 감정으로 곡을 전개해나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다행히 선원들은 '이 쪽이 낫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우리는 단독공연이 끝나고 녹음 시작까지 그 며칠 안 되는 시간을 연주의 디테일을 수정하며 보냈다. 시간에 쫓겨 불안한 마음이 있었으나, 우리는 우리를 믿었다.
2016년 1월 이후의 녹음, 그리고 이후의 믹싱과정 등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쓰고싶진 않다. 그 시점부터는 기술적인 관여가 많아지고, 기술적인 관여에 대해 쓰는 것은 내가 전문이 아닐 뿐더러 글을 읽는 리스너들의 흥미를 딱히 끌만한 내용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이 곡을 믹스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 정도는 쓰고 싶다. “거인"은 [뿔]에 수록된 곡들 중 가장 많은 퍼커션이 들어가있는 곡이지만, 그렇다고 퍼커션이 공격적으로 치고나오는 음악은 아니다. 오히려 따듯하게 감싸 안아주는 듯한 톤을 만들어내는 것이 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퍼커션과, 더불어 베이스가 어떤 느낌으로 이 곡의 전체적인 바탕을 만들어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일단 바탕이 잘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잘 굴러가지기 마련인 까닭에서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음악에 대해선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이 곡은 듀엣곡이고, 후렴구에서 푸른하늘 씨와 같은 멜로디를 옥타브 차이나는 유니즌으로 불렀다. 그렇게 한 까닭은 '화자'를 애매하게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스 헤테로 남성이며, 시스 헤테로 남성이 이런 내래티브를 쓸 때는 꽤 많은 경우 습관적으로 '화자'를 여성으로, '거인'은 남성으로 표현하게 된다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꼭 그렇게 들리는 것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또한 거인보다 작은 존재로 지레짐작 되는 화자가 후렴을 부르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도─그러니까 거인이 화자를 향해 부는 것으로도─들렸으면 했다. 크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다는 것은 무엇일까? "거인"을 쓰면서는 그에 대해 계속 생각했었다. 나는 내가 겪었던 그 혼란 내지는 애매한 감정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물론 이 곡에는 이성애적 로맨스물의 클리세들이 적잖이 삽입되어 있다. 그래야 더 함정이 많아지고,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너의 눈은 너무 깊어"로 시작되는 이 곡의 첫 구절이 가장 첫 버젼에선 "너는 너무 커"였음을 밝혀둔다. 'ㅓ’ 발음을 음절마다 반복하는 이 가사가 나는 리드미컬하다는 점 때문에 좋아했다. 하지만 마치 성적인 함의가 있는 듯 보일 수도 있는 까닭에─나는 그것을 의도하고 싶지 않았다─첫 구절을 바꾸게 되었다. 가사를 쓰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가장 자신없던 곡 중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나는 이 곡을 전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 곡을 좋아해주신 덕분이다. 하지만 이 곡의 비디오를 낼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이해강 작가에게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비디오가 처음 공개된 것은 분당아트페스티벌BAF에서 였다. 아티스트 크루 KEEPUSWEIRD에서도 함께 하고있는 이해강 작가는 수호갤러리와의 인연으로 이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었고, 거의 두 달에 걸쳐 이 비디오를 작업해 페스티벌의 오프닝에서 선보였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다. 살아가면서 천천히 갚아나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고마운 사람을 여럿 만든다. 그것이 이 일에게 가장 고마운 점이다.
(단편선)
Directed by Hail of KEEPUSWEIRD
Music
Producer - Danpyunsun and the Sailors / Choi Jeonghoon(Audioguy)
Director - Danpyunsun
Recording Engineer - Choi Jeonghoon(Audioguy) / Lee Seunghwan(SangsangMadang Chuncheon)
Mixing Engineer - Choi Jeonghoon(Audioguy)
Mastering Engineer - Yi Jaesoo(Sonority Mastering Studio)
Assistant Engineer - Choi Jeong-eun(Audioguy) / Lim Kangwoo(Audioguy) / Ahn Hyeram(Audioguy)
Vocal Director - Kang Jinwon
Featuring - Kwak Pureunhaneul
Violin - Jang Soohyun
Electric Bass - Choi Wooyoung
Percussion - Jang Dohyuk
Vocal / Folk Guitar - Danpyunsun
■ More about Danpyunsun and the Sailors
http://danpyunsun.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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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witter.com/DPS_Sailors